그날도 습관처럼 자기 전에 옆으로 누워 휴대폰 화면을 엄지 손가락으로 슥슥 올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이 소설가로 등단했다는 소식을 보게 된 거다. 그 사람이 누구냐면,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모르는 사람도 아닌 그러니까 랜선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람 중 하나였다.
내 기억 속에서 그 사람은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면서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었다. 그가 소설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고 해서 나를 속인 것도 아니고 밝혔다고 한들 내가 놓쳤거나 보고도 잊어버렸을 수도 있을 텐데, 이미 내 마음속은 질투의 감정으로 가득 차 잠이 싹 달아났다. 그것은 순전히 부러움이었다. 그걸 알아차리고 나니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를 온통 장악해버린 그 부러움이라는 감정 때문에 몹시 혼란스러웠다. 왜냐하면 나는 단 한 번도 등단을 준비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대로 휴대폰 화면을 엎고 몸을 똑바로 돌려 깜깜해진 천장을 바라봤다. 이대로 자야하는데 어느 틈에 다시 화면을 켜고 그 사람의 아이디를 눌러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대체 언제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한 거지? 완전히 의미 없는 질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답을 구하기 위해 선뜻 멈추지 못했다. 정말이지 자괴감이 밀려왔다.
나는 다시 신나고 재미있는 소셜네트워크 생활로 돌아갔지만, 이때 내 마음속 깊이 박힌 감정은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숨어 있다가 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누군가의 합격 소식, 예상치 못한 결혼 소식, 가 본 적 없는 여행지의 풍경, 난생처음 보는 음식들이 네모 반듯한 사진 속에서 근사한 포즈를 취하고 있을 때마다 하던 대로 가볍게 엄지를 눌러 하트를 보낼 수가 없게 된 거다.
방금 전까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것들을 좋아해도 되는 걸까?
내가 원한 적 없는 것들을 누군가 이뤘다고 갑자기 부러워하는 게 가능한 걸까?
사실은 부럽지도 좋지도 않으면서 인터넷 법도에 따라 예의를 표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예의가 나쁜 건 아니지만 정작 솔직한 순간에는 ‘좋아요’ 하지 못하고 그때처럼 질투에 사로잡혀 잠을 설치게 되면 어쩌지?
물음표가 늘어날수록 확신이 왔다. 나는 알지 못하지만 모르는 것도 아닌 사람들의 일상을 너무 과하게 보고 있었다. 느끼지 않아도 될 질투를 경계하는 건 몹시 피곤한 일이었으며, 고작 솔직해진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소셜네트워크를 하기 전에는 몰랐던 거다. 이 망할 sns를 끊어버리고 싶어.
- 난... 친구의 행복을 솔직하게 기뻐하지 못하는 옹졸한 나한테 화가 난 거야.
- 그럼 솔직해지는 연습을 하면 되잖아요.
몰라도 괜찮을 소식을 처리하기 위해 소셜 네트워크를 끊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질투가 무조건 나쁜 감정은 아니라는 건 안다. 타인에 대한 관심과 흥미에서 시작된 질투는 존경이나 사랑으로 발전해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니까. 물론 질투가 나쁘게 발현되면 나의 일상을 망치게 된다. 하지만 솔직해지는 것으로 우리는 불행을 막을 수 있다. 타인의 행복을 부러워하고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은 관계를 풍성하게 만들고 서로를 더 아끼게 해 주니까. 그래서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 말은 틀렸다. 질투라는 감정을 유아적 상태에 머물게 두지 않고, 그 마음을 서툴지 않게 표현하는 것으로 우리는 성숙한 솔직함을 가진 어른이 된다고 믿는다.
지금도 여전히 누군가의 성취나 소유가 나를 조급하게 할 때가 있다. 나 빼고 다 부유한 거 같고(아님), 나 빼고 다 행복한 거 같고(아님), 나 빼고 다 고양이가 있는 거 같아서(이건 맞음) 마음이 초조해지고 불안해지다 결국 우울해지곤 한다. 그 사람이 가까운 사람이든 랜선에만 존재하든 사람이든 관계없이 잠 못 이루던 그날 밤의 복잡한 감정을 문득문득 불러일으키곤 한다. 그런 마음을 억지로 막을 수는 없지만, 그때처럼 당황하지는 않는다. 왜냐면 솔직한 마음에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걸 이제는 아니까. 작은 휴대폰 화면 속 더 작은 정사각형의 사진들을 엄지로 슥슥 올리면서, 부러워하지 않아도 될 대부분의 사진과 진짜 부러워할만한 몇몇의 사진을 구분하며 솔직해지는 연습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