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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23. 01:40

자살 충동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파괴되어야 할 건 살아 있는 내 육체가 아니라 내가 그 육체로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내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이들은 죽은 사람들이었다. 밤늦은 시각 내 곁을 지켜준 작가들과 화가들과 작곡가들. 그들이 어떻게 해냈는지 알아야 했다. 나는 언제나 기존 인생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다른 곳에서 새로 시작한, 실을 끊어내고 방황한 영혼들에게 매료되었다. 그들이 어떻게 버텼는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알아야 했다.


역경이 우리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본질을 제련하고 갈고닦는 숫돌이라는 건 우리 문화에서 가장 사랑받는 미신이다. 그러나 사실 결핍과 우울과 좌절된 야망과 고통은 멀쩡했던 사람을 배배 꼬아놓는다. 여기서 못된 주정뱅이와 제멋대로 구는 개새끼들이 태어난다.


외로움과 절망에서 나를, 또 내가 아닌 누군가를 구해줄 유일한 수단은 공동체와 사회의 감각을 느끼는 것이다. 끈끈한 가족이 없는 이들은 동족을 찾고 인정받기를 갈망한다. 글을 쓰는 행위—인생의 어느 시점에 우리의 목숨을 구해준 철학자와 이야기꾼과 양성적인 괴짜들로 우리의 앙상한 가계도를 채우는 행위는 그래서 중요하다. 어쩌면 해법은 스스로를 자기 경험과 생각을 담는 용기로 규정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난 세월 느낀 것들로 국한되는 존재가 아니라고, 우리의 역사는 몸으로 행하거나 겪은 일의 목록이 아니라고, 우리의 가족은 어렸을 때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거나 유전자를 공유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믿는 것일지도 모른다. 해법은 자신의 경계를 격렬하게 밖으로 밀어내는 것, 자신의 모순을 찾아내고 자신을 다른 것들과 분리시키는 무언가를 이와 발톱으로 파괴하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노력하고 있다.


- 제사 크리스핀, <죽은 숙녀들의 사회> 중에서 발췌



그녀의 한탄에 공감하며 나는 분노를 일으키는 의문들을 안주 삼아 씹었다. 여성의 투쟁은 왜 투정이 되는가. 남성 작가의 광기는 천재성이 되는데 왜 여성 작가의 광기는 (여성의 기본값인) 히스테리가 되는가. 그녀들의 독특한 감수성은 왜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하고 자연의 산물, 숭고한 모성, 남성의 뮤즈로 전락하는가? 

그녀는 다독이듯 역설했다. 변방이 가능성이고, 결핍이 영감이고, 제약이 창조성의 조건이 될 수 있다고. 

그녀는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한다. 혼자서 배낭을 메고 갈 수 있다고, 거기서 말라죽는 것보다는 길거리를 떠도는 것도 괜찮은 매혹이라고.


- 홍승희의 추천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