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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4 10:51
요즘 나는 털에 대해 생각한다. 몸에 나는 털 말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기적으로 왁싱숍에 들러 겨드랑이털을 매끈하게 정리하고 관자놀이 주변에 하나 둘 올라오는 새치가 눈에 띌 새라 염색으로 흰색을 가려버리는 일이 당연한 일상 중 하나였는데 문득 "인간은 왜 털을 미는가"라는 질문이 나를 가로막은 것이다. 단지 게을러져서 그런 질문에 봉착한 것이 아니라, 게으름에 더해 몇달 전 읽은 책이 나를 각성했다고 보면 맞다. 시작은 겨드랑이 털을 기르고 시원하게 민소매를 입은 여성들의 사진을 인터넷에서 본 것인데, 그 발랄한 모습은 자동적으로 지금의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진 속의 엄마를 불러냈다. 생각해보니 우리 엄마들은 겨드랑이 털을 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여성인류는 이런 귀찮은 과정을 추가하게 된 거지? 여성들이 겨드랑이 제모를 시작한 건, 남자에게만 팔던 면도기를 여자에게도 팔기 위해 착안한 대기업의 마케팅에서 비롯되었다는 정보는 검색을 통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민소매 드레스를 입은 여성의 이미지와 함께 '여자의 겨드랑이는 얼굴처럼 부드러워야 한다'는 카피로 털 없는 겨드랑이를 미의 기준으로 부각하며 여성의 겨털은 수치스럽다는 인식을 퍼트린 것이다. 이 회사는 질레트다. 이후 다른 면도기 회사들도 여기에 동참했고, 여성면도기 시장은 급성장했다. 오늘날 겨드랑이 제모는 여자다움의 에티켓이 되어버렸고 아무도 의심이나 저항 없이 팔을 들어 털을 민다. 50년대 한 기업의 마케팅이 100년 가까이 흐른 뒤 문화가 되어버린 셈이다. 솔직히 겨드랑이 털을 미는 일이 별일은 아니다. 샤워 중 거품을 내는 과정에서 양쪽 팔을 번갈아 들어 면도기로 미는 과정을 하나 추가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어쩌다 타이밍(?)을 놓치는 순간 이 사소한 털들은 대단한 별일이 되어버린다. 수영장 탈의실에서, 또는 갑자기 섹스를 하고 싶은 무드가 되었을 때, 겨드랑이에 솟아나기 시작한 털만큼 거대한 문제는 세상에 없다.

사소한 주제에 대단히 거슬리는 이 털의 존재를 인식하고도 나는 한동안 제모를 멈추지 못했다. 내게 있어서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외출하는 것보다 높은 단계의 결심이 필요한 일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여자다운 게 어딨어>라는 책을 읽게 되었는데 제모 거부, 삭발, 가족 모임에서 (남자형제들처럼) 부엌일 하지 않기 등을 실천한 지은이의 경험담이 드디어 나를 결심하고 행동하게 만든 것이다. 영국인인 저자 에머 오툴은 날씬한 몸매를 위해 식이장애로 쓰러진 적도 있고 성차별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하던 '안티 페미니스트'였다고 한다. 이런 사람이 어쩌다(!) 격렬한 페미니스트가 되었는지는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나처럼 한국에서 자라 여기서 계속 살다보면 느낌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가령 메갈리아 사이트의 url도 모르지만 '너 메갈이냐'는 소리를 듣는다든지 하는 경험의 축적으로 말이다. 요즘 한국에서 여자는 따로 페미니스트 선언을 하지 않아도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 순간 페미가 되어버리고 자동으로 공격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아무일도 하지 않고 단지 페미니스트 선언을 하는 것만으로도 칭송을 받는 남자들을 보며 마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는 거다. 저자는 꾸미기를 좋아하는 여성이지만, '여자다움'에 대한 걱정 때문에 민낯으로 출근하지 못한다면 그건 분명 문제라고 말한다. 나또한 여성의 겨털이 남성의 수염 기르기처럼 스타일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 면도를 하지 않은 남성이 '왜 이리 수척해, 깔끔하게 면도 좀 하지~' 정도의 고나리질을 받는 것처럼 겨털을 기른 여성과의 대화가 '꽤나 풍성하네, 수영할 때 저항력으로 방해되지 않아?' 정도의 스몰톡이 될 수 없는 현실이 문제라는 것을 자각한 것이다. 하여간. 그렇게 나는 수개월 째 겨드랑이 털을 길렀다. 이것이 겨울이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못하지만, 사우나 탈의실을 드나들고 반팔 운동복을 입으면서도 초연하기 위해 나름 애쓰며 정성을 다해 나의 겨드랑이를 방치했다. 새치머리 염색을 멈춘 것도 같은 시기다. 난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내 몸의 털들을 해방시키는 것이야말로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내 몸의 털을 검열하며 살아온 인생에 대한 해방이라 믿었던 것이다!

이 작은 해방 운동은 생각지 못한 일로 인해 지난 설 연휴를 기점으로 실패했다. 몇달 만에 방문한 딸의 헤어 라인에 하얗게 올라온 새치머리를 본 모친이 몹시 충격 받은 얼굴로 '내 딸이 이렇게 늙었다니'를 연발하는 통에 효도는 못할 망정 불효를 늘리지는 말자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저 튀어나온 말이 아니라, 모친은 정말 침통한 얼굴이었다. 나는 모친과 함께 대형마트로 가서 염색약을 골랐다. 그리고 나의 머리를 정성스럽게 염색해준 모친은 다시 까매진 내 머리를 보며 그제야 웃으며 말했다. 아직 주름도 없는데 머리염색을 잊지 말고 꼭 해야 한다고. 그날 저녁 나는 샤워를 하며 겨드랑이도 밀어버렸다. 버티고 버티다 새치머리 염색을 하고 나니, 옷이 얇아지는 여름엔 결국 이 털들도 밀고 말 것이라는 패배감이 미리 찾아온 것이다. 그래도 팔을 번쩍 들어 면도기로 겨드랑이를 밀면서 생각했다. 비록 에머 오툴처럼 겨드랑이 털을 풍성하게 기르고 민소매를 입은 뒤 사람들 앞에서 손을 번쩍 들어올리는 일을 내 평생 한번도 못할 수는 있지만, 언젠가 소심한 이 털의 해방을 다시 한번 시도 하겠다고.